오랜만에 보는 원주 시외였다. 일주일 동안 병원실습-자취방-병원실습 무채색 동선을 반복하다가 차창 밖으로 보는 야외 풍경은 탐스러웠다. 푸릇푸릇한 기가 어느 정도 가셔진 벼논, 도로 가를 따라 피어난 코스모스를 바라보니 꼭 소풍 가는 기분이었다. 콜밴 안에 같이 있는 세명대 분들하고는 금방 낯을 익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 그런데 갔다 와서 후기 써야 한대~”,

“헐, 안 돼, 만약에 저보고 쓰라고 한다면 초현실주의로 막 나갈 건데.”

“야, 그거 좋네!! 제1의어르신이아프다고그러오 제2의어르신도아프다고그러오, 그런식으로 쓰려고? 완전 기대된다~ 꼭 네가 써라!! 잘 해봐~”

차가 속도를 내는 바람에 살짝 멀미를 느껴 잠시 눈을 감았다. 약침이란 것을 접한 지는 정말 최근의 일이다. 예1 입학할 때는 전혀 모른 상태였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그냥 그런게 있나보다, 식으로 몇 번 얘기로 들은 적은 있었다. 약침학이란 과목은 이번 학기부터 배우게 되었고, 직접 약침을 만져보고 맞아본 것은 바로 3일 전 병원실습 때 처음이었다. 아랫배의 기해, 관원이라는 혈에 기제, 등허리의 신수, 지실이라는 혈에 윤제를 맞았었다. 그 날따라 유난히 피곤했는데, 약침을 맞고 수업 버티기가 수월했던 기억이 난다. 약침 봉사현장에 가면 더 많은 종류의 약침을 볼 수 있겠지, 로컬에서 유명하신 분들이 오신다는데, 어떤 식으로 진료하실지 잘 봐 둬야겠다. 점심에 중식 준다는데 중국음식 뭐가 나올까, 짜장면? 군만두? 에이 그래도 탕수육쯤은 나오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금세 귀래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서 잠깐 헤맸지만, 관계자분과 전화 한 통화로 금세 봉사현장에 도착했다.

준비해간 가운을 입고 1층 진료실에서 개소식을 하면서 각자 자기 소개와 인사, 그리고 업무 배당을 했다. 원장님 한 명마다 봉사학생 한 명이 어시스트하는 식이었는데, 나는 2층 약침 관리를 배당받았다. 약침학회 상근자 분을 돕는 역할이었는데, 바이엘에서 약액을 뽑아 준비하는 과정을 매우 차근차근 배울 수 있었다. 약액을 준비하면서 용량 맞추기, 가스 잘 빼기 이런 것에 신경을 집중했는데, 중간에 약침 한 곽이 무척 비싸다는 얘기를 들은 다음에는 진공 바이엘에서 약액 한 방울까지 잘 뽑는 것까지도 신경 쓰려고 했다. 그런 것도 다 초반이었고, 계속 하다 보니 리듬을 타면서 쏙쏙 뽑아내는 머신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Sweet BV와 자하거 위주로 많이 준비했는데, 자하거가 예상보다 덜 쓰였다. 황련해독탕, 중성어혈 이런 것도 몇 대 사용되었고, 학교에서 맞았던 CF, BUM은 많이 쓰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신기했던 것은, 약액별로 주사기에 주입하는 손맛이 달랐다. 가장 많이 쓰인 영예의 베스트셀러 Sweet BV를 평균으로 했을 때, 자하거는 좀더 뻑뻑하고, 황련해독탕은 좀더 수월했다. 특이했던 건 약침의학과2를 맡은 이 원장님이 2cc 주사기에 따로 준비해달라고 하신 청열제, 청폐제였다. 약액 주입방법이랑 외형이 인슐린 주사기와는 달라서 처음에는 상근자 분이 도맡아 주셨다가 차츰 여유가 생길 때부터 나도 주입해보았다. 그런데 몇 대 준비하지 못해 금방 점심시간이 되었다. 예상했던 중식보다 훨씬! 알차고 맛있는 한식 백반이었다.

점심을 먹고 와서 오후 진료를 시작했다. 봉사 왔으면 진료 하는거 옆에서 보는 기회도 있어야 한다면서 현성이가 배려해 준 덕분에 오후에는 재활의학과 어시스트를 맡게 되었다. 진료하시는 분이 상지대학교 선배이신 박사한 원장님이었는데, 학교 선배여서 편하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다녔던 국악원에 옛날에 원장님이 다니셨다고 얘기해서 어머 신기하다!! 생각했고, 민요와 성악, 발성에 대해 얘기해 주시던 딱! 그 타이밍에 오신 환자분이 마침 성대결절 환자분이어서 어머머 신기해라! 싶었다.

오후만 해도 많은 환자분이 오셨는데 문득 기억나는 환자분들을 추려 보았다. 나랑 이름이 같으셨던 40대 후반의 여자 환자분, 위암 수술 후 투병 중이셔서 극도로 허하지만 정신력은 강해 보이시는 할아버지 환자분, 아이를 열두 번 낳으시고 내내 고생하셔서 매우 힘들어보이셨지만 자식들 얘기할 때는 표정이 벙글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시는 할머니 환자분, 이런 분들이 계셨었다. 환자분들 전반적으로 약침이란 치료 수단을 생소하게 느끼지 않을까 걱정는데, 원장님의 자상한 맞춤 설명을 듣고 다들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셨다. 학교 동아리에서 갔던 의료봉사와 비교했을 때, 이번에는 일요일이라서 교회 갔다가 댁에 가시는 길에 들렀다는 분들이 많은 특징이 있지만, 할머니 환자분들은 자식,손주 얘기할 때 가장 얼굴이 환하셨다는 것만큼은 어느 동네나 마찬가지였다.

오후 네 시쯤 진료를 종료하고, 진료소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봉사단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어서, 탄탄하게 꾸며져 있던 진료소가 금세 다시 마을회관으로 돌아가기 까지는 삼십 분에서 한 시간 남짓?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또 진료 오신 원장님들, 상근자 분들, 봉사학생 모두가 열심인 분위기여서 진료 시작부터 끝까지 아무 문제없이 수월하게 흘러갔지 싶다. 다만 조금 아쉬웠던 게 뒤풀이였는데, 다음날 원장님들도 출근하셔야 하는 데다가, 교통편이 원활하지 않은 농촌이라 7시 즈음에 뒤풀이까지 모두 마치게 되었다. 그전에 <올댓닥터>라는 책을 읽고 나서 계속 궁금했던 허영진 선배님 말씀도 들어보고, 세명대 분들하고 좀더 얘기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많이 아쉽다. 또 세명대 분들이 우리 동네인 원주까지 오셨는데 터미널 버스 타는 순간까지 바래다 드리지 못해서 미안하다.

약침이라는 치료 수단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자 참가한 봉사였지만, 사람에 더 반하고 온 봉사였다. (특히 ‘다음에 또 만나면 되잖아, 그렇지?’ 하시면서 껴안아주신 손목원 사무국장님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너무 멋있었다.) 가을날, 진료소를 찾아와주신 환자분들의 얼굴이 벼이삭 같고 코스모스처럼 다가오는, 소풍 같은 봉사였다.